보스의 부족함을 메워주자.

외국계 회사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던 시절, 내가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그룹은 영업조직, 텔레세일즈 조직, 제품 매니저들, 보스들, 지방 영업 사무소들,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 (도매, 소매 세일즈 파트너들, 마케팅 행사, 기술 교육 등 다양한 외부 협력 파트너사들이 있다) 등 8-9개의 다른 그룹의 각 그룹당 몇 명씩 되는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모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뭔가 하나가 바뀌면 여러 그룹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해 전날 세일즈 데이터를 집계해 보고, 그날 계획을 세우고 저녁 먹을 때까지 하루 종일 다양한 사람들과 시간별로 미팅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 내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 본사, 싱가포르 아시아 본사, 아시아 지역 다른 나라들에서도 연락을 해온다. 갑자기 급한 컨퍼런스 콜에 들어오라고 연락이 오면 10분 내에 헤드셋을 끼고 보스와 함께 콜에 들어가야 하고 매일 쌓이는 영어 메일도 놓치지 않고 답을 해야 했다. 영어 능력은 외국계 회사에서 일 잘 한다고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차장인 내게 하루에 오는 메일은 100통이 넘는 우리말 메일을 제외하고 영어 메일만 100통, 보스인 이사님은 200통을 받는다. 이사님은 첫 직장으로 입사해 15년 이상 근무하며 영업 본부를 처음부터 일궈오신 분. 영어는 그다지 잘 하지 못하셨다. 하루에 200개씩 영어 메일이 쌓이면 제목만 읽기도 쉽지 않다. 제목을 읽고 정보성 메일도 읽어야 하지만 답을 꼭 해야 하는 메일은 반드시 시간 안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영어 메일 때문에 고민하시는 이사님을 보면서 영어 잘 하는 내가 뭘 좀 해 드려야겠다 생각을 했다.

“이사님, 9시 50분에 싱가포르에서 OO가 보낸 메일은 읽어보셔야 합니다.”

“이사님, 3시에 미국에서 온 메일은 오늘까지 답을 하셔야 하는데요.”

“응, 알았어.” 대답은 하시는데 영어가 편하지 않으시니 읽다가 혹은 답장을 좀 쓰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놓고 나서는 일이 반복되면서 메일을 놓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줄지 않는다.

‘에이, 이거 내가 해 줘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님, 제가 답장을 좀 써 드릴까요?”

“응, 좀 써 줘라.”

답을 조금씩 쓰고 이사님이 좀 더 보완해 메일을 보내길 몇 주, 이렇게 해서는 빠뜨리지 않고 다 처리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이사님이 또 메일을 쓰신단다. 이사님 옆 자리로 갔다.

나: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사님, 비켜.” (이때 절대 퉁명스러워서는 안 된다. “이사님 좀 비켜주시겠습니까?”도 재미없다.)

이사님: (웃으며) “에이, 쉐끼. 알았어.”

(나는 이사님 의자에 앉았다. 이사님은 옆에 있던 작은 의자에 앉았다.) 나: “불러.”

이사님이 불러주는 우리 말 답변을 그대로 영어로 번역했다. 그대로 보내면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실 것 같아 검토를 같이 해 드렸다. 영어 writing은 안 되어도 우리가 reading은 좀 되니까.

“이사님, 우리 중학교 때 ‘cannot help ~ing’ 배웠잖아요. 생각나시죠?”

“응, 그건 알아.”

하나하나 번역했던 문장이 의도대로 쓰여졌다는 걸 확인시켜 드리고 말했다.

“이사님, 이제 싸인해서 보내.”

“응, 땡큐~!”

이사님은 이름만 써서 Send 버튼을 누른다.

우리 이사님은 비즈니스 감이 떨어지고 늘 완벽을 추구하답시고 마감시간을 하루 놓치던 내게 “비즈니스는 타이밍이 품질보다 중요할 때가 많다”며 한정된 시간 안에서 스마트하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영업팀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 보는 법, 잘 볼 수 있게 정리하는 법을 액셀 템플릿을 손으로 그려가며 가르쳐주신 분이기도 하다. 조직에서 ‘쟤는 정말 안 된다. 보내야 한다.’라고들 생각하던 친구도 “내가 키워보겠다”며 걷어와 훌륭한 세일즈맨으로 키워낸 분이다. 참 훌륭한 리더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인간적인 면이 물씬 느껴지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던 리더인 내 보스가 영어 좀 부족한 게 뭐가 문제인가. 그건 내가 좀 더 나으니 해 드리면 되지. 난 이사님의 영어 메일을 써 드리고, 컨퍼런스 콜에 같이 들어가서 “한국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도록 종이에 문장을 써 드렸다. 외국의 중요 손님들이 오실 때 이사님이 하실 말씀을 준비해 영화 대본처럼 준비해, 이사님 대사 연습해 보시라고 앞에서 지켜보고 발음 연습을 시켜 드렸다.

“내가 네 앞에서 영어로 이걸 하고 있어야 하냐, 쪽팔리게.”

“이사님, 이사님 영어 실력 내가 다 아는데 뭐가 쪽팔려. 그날 가서 영어 안 되는 게 쪽팔린 거지. 빨리 해 보세요. 완벽하게 될 때까지 연습해야지. 빨리~.”

마지못해 연습을 하지만 시작하면 별로 창피할 것도 없다. “그 발음 다시, 다시. 이렇게.”

그날 가서 연습한 대로 평소보다 훨씬 유창하게 하시니 외국 손님들이 다들 말한다. “영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사님도 기분 좋고 나도 완전 보람있다.

이 정도 관계가 되면, 너무 깍듯하게 하는 것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 하면 “아”하는 관계. 얼굴만 봐도 뭐가 필요한지 딱딱 알아서 해 주는 관계. 내가 보스 일 좀 걷어와서 두 배 해 주면 어떤가. 몸 좀 피곤해도 기분이 좋아 피곤함 다 이겨낼 수 있다.

가끔, “그러다가 보스가 자기 일 아무 것도 안 하고 저한테 다 맡기면 어떡하죠?”라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나는 “어디까지 맡기시는지 한 번 해 보세요. 보스가 중독되면 엄청 잘 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경우 없이 다 해 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요.”라고 답해준다.

보스가 못하는 부분을 보고 불평하는 대신, 내가 그걸 더 잘 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보스의 부족함을 메워줄까를 고민하자. 보스가 사장님 발표 때마다 쫄아서 망쳐서 우리 부서가 대접을 못 받는다면, 프레젠테이션을 훨씬 잘 하는 우리가 자료도 만들어드리고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가르쳐’ 드리고 연습 및 리허설을 시켜 중요한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발표하도록 도와드리자. 후배가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 회사 대표로 나갈 때 도와주듯. 다만 선배님이니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배려해 드리고, 자존심 상해하시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지 말고 이게 무슨 자존심 상할 일이냐고 말씀드리자. 회사가서 보스를 만나는게 즐거운 일이 된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