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도 안 주던 가장 어려웠던 청중

11년 전, 증권회사에서 금융상품을 만드는 일을 할 때였다. 전국 150여개 지점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순차적으로 회사 연수원에 불러 여러 가지 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들을 가르칠 사내강사를 선발했다. 나도 뽑혀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고 교육을 하러 갔다. 연수원에 모인 20대의 젊은 동료직원들은 수업 태도도 좋고 사내강사인 동료들을 선생님 모시듯 깍듯하게 대해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주 힘든 청중을 가르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분들은 10년 전에 주식영업 (고객이 주식을 사고 팔게 조언해서 수수료를 버는 영업)을 ​잘 해 회사를 먹여살리던 역전의 용사들이었지만 최근 실적이 부진해 회사에서 떠나보낼까를 고민하다가 마지막 기회로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시킨 분들이었다. 회사에 돈 많이 벌어다주며 대접받다가 부진자 교육에 불려오니 자존심이 많이 상한 이 분들을 만나고 온 동료 사내강사들은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전혀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아예 신문을 펴 놓고 눈도 안 마주쳐요. 수업 분위기는 커녕 몇 시간 동안 벽에다 이야기하다 왔다니까요.” “이 수업 들으면 뭐가 달라지냐는 거에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요.” 갔다 온 사람들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맡은 수업은 새로운 금융상품 영업을 위한 ‘재정설계’ (personal financial planning, 재무설계라고도 한다) 방법. ​고객 가정의 재무상태를 파악하고 언제쯤 어느 곳에 쓸 자금을 어떻게 준비하는지 적절한 재테크 방법을 제안해 주는 컨설팅 방법이었다. 가기 전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분들이 내 강의를 제대로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고민하다가 이걸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는 청중에게 재정설계 방법을 몇 시간 가르치는 것보다는, 교육 잘 받고 노력하면 회사에서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밤이 되어 몇 시간 남지도 않았지만 아마존(Amazon)에 들어가 PB(Private Banker), FC (Financial Consultant) 커리어에 대한 전자책 (E-Book)을 사서 읽었다. 책이 두껍지도 않았고 다급하니 영어인데도 눈에 팍팍 들어와 필요한 내용을 2-3시간 안에 알아냈다. 새벽까지 자료를 만들고 교육장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인사를 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다니시던 분들이 동네 아저씨 차림으로 다들 너무 편하게 입고 오셔서 신문을 완전히 펴서 사각사각 념겨가며 읽고 있다. 늘 그렇지만 ‘왜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야 하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신 여러분들은 저보다 10살은 많은 형님들입니다. 저보다 증권회사 경력도 훨씬 많으시고, 영업 잘 하시던 분들인데 제가 형님들한테 무슨 영업 스킬을 가르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걱정하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좀 덜 수 있는, 새로운 금융 커리어에 대해서는 제가 공부를 해서 좀 더 알고 있으니 그걸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난 상관없어’ 하던 아저씨들이 신문을 일제히 덮고 나를 쳐다보는게 아닌가. ‘이제 됐다.’ 나는 형님들과 connect되었다. 주어진 4시간 중 3시간 동안, 뭘 공부하고 준비하면 은행에서, 보험에서, 증권에서 재무 컨설팅을 하면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되는지를 알려드리고 나머지 1시간 동안만 원래 하기로 했던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4시간 내내 정말 집중해서 잘 들었던 그분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만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니. 회사 후배인데.’ 가슴이 뭉클하고 내가 참 의미있는 일을 했구나 라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가장 어려웠던 청중이었는데.

교육 후 모두가 ​회사에 남지는 못했지만 반 정도의 분들이 다시 영업 전선으로 돌아가 일하게 되었고 이 중 10%는 영업을 잘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잊지 못할 경험을 한 후, 난 교안에 없어도 내 청중들이 듣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되는 이야기를 내 스타일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해준다. 내가 지겨우니 매번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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